2012年5月14日月曜日

구 자철의 팬티


그저께 밤, 매우 오랜만에 다카하시 유지(현대음악의 세계적 거장이자 작가로서 존 케이지, 사카모토 류이치 등에게 영향을 끼친 대표적 인물, 역주)의 『콜렉션 1970년대』를 다시 읽었다.이 앤솔로지는 읽을 때마다 느낌이 바뀐다.
특히 제3장 ‘살기 위한 노래’의 완성도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글과 말로는다 표현할 수 없다. 
마치, 나의 이해를 가볍게 내치는 듯한 그런 부드러움이그의 이론에는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

「이 100년간 일본의 음악은, 유럽을 향해있다. 유럽의 감성, 기술, 미학을 수입하여, 국내판 제품으로 가공하는 것은 작곡가의 일이다. 그 과정은 가속화되었고, 세련되었으며, 종국에는 유럽으로의 가공제품의 역수출까지 가능해졌다. 일본의 현대음악은 국제적 수준에 달한 것일까. 과연, ‘국제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 일본의 작곡가들의 활동원리는 무엇인가. (제3장 개인의 이론을 배제하다 中)」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밀실음악비평에 대한 비판.
이 책의 표지에는, 간결한 이 단어들이 곁들여져 있다.
하지만 반복하여 읽는 동안, 당연한 사실을 문득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중심주의에의, 밀실비평에의 비판서이다.
유럽과 음악이라는 장식은, 그저 ‘접사’에 불과하다.

아우구스부르크 vs 함부르크SV(2012년 5월 5일)

어제 아침, 이 동영상을 보았다.
「35' [1 - 0] 구자철」
동영상의 제목은 아시아인에게 있어 흥미를 끌만한 것이었다
(혹은 ‘호소가이 하지메는 선발 풀타임’ 이라는 서브 타이틀도)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동영상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골을 넣은 후, 자신의 팬츠를 보이며,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든
구자철은 과연 무엇을 어필하려고 한 것인가.
떠오른 의문을, 후배에게 물어 보았다.

김동현에 의하면 구 자철의 팬티에 쓰여져 있던 글은, 
‘고인에 대한 명복을 빕니다’ 라는 메시지였다고 하며, 
그 고인이라는 것은 이 시합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의문의 자살로 세상을 떠난 윤기원이라는 축구선수라고 한다. 
(구자철 자신은 시합후의 인터뷰에서 메시지에는 세 가지의 사건에 대한 것이라 언급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12&aid=0002295267 ,역주)
생전, 윤기원에게는 승부조작에 대한 혐의가 씌여져 있었고, 한국 국내에서는 
자살의 원인을 승부조작에 대한 관여에 대한 것이라 보는 시각이 많았다고 한다.

어제 오후, 후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윤기원의 자살과 구자철의 메시지에 대해 
조사해보았다. 
위키페디아, 중앙일보, 개인 블로그 등 윤기원에 대한 소스는 적지 않게 존재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구자철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일본어) 소스는 찾기가 어려웠다. 
마치, 구자철의 세레머니따윈 애초에 없었던 듯한 착각을, 일본의 미디어는 우리에게 주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인 선수가 나타낸 그 추도의 세레머니보다도 이탈리아인 선수의 감사의 세레머니나 스페인인 감독의 석별 세레머니를 (스토리로서) 우선하여 보도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의 스포츠미디어의 현 상황이다. (“나 본인도 또한 미디어이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K리그를 덮친 승부조작의 어둠은 상당히 깊은 것이었다.
위키페디아에 의하면 승부조작에 관여한 감독/선수는 국민체육진흥법 위반 및 사기죄로 
기소되었고, K리그에서 영구추방을 포함한 상당한 처분이 내려져 있는 상태이다. 
(링크해둔 사건의 경위에 있듯, 윤기원의 자살이 이 소동의 불씨가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이것들의 소동이 결코 과거의 일 = Accident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일, Incident 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제 밤, http://bit.ly/JbqWW5 이 사이트에서 앞서 말한 시합에 관한 기사를 발견했다.
「2012年05月06日 00:55」
송고 일시는 그저께의 새벽 (즉 시합이 끝난 직후)
정확히 내가 『콜렉션 1970년대』를 읽고 있었을 때다.
(기사의 타이틀은 「호소가이가 올시즌 분데스리가 일본인 최다인 32시합 출장, 아우구스부르크는 3경기만의 승리」)
물론, 기사에 구자철의 어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유럽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선수, 기사에 사용된 것은 
이미 흔하디 흔한 그 ‘구조’뿐이었다.
그러나, 읽어가는 도중, 나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기사에 첨부된 사진. 그것은 분명 구자철의 메시지를 담(아 버리)고 있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 아침, 나는 컴퓨터 앞에서 다카하시 유지의『콜렉션 1970년대』를 읽고 있었다.
이 앤솔로지는 읽을 때마다 나의 사고(思考)를 정리시켜준다.
특히 제3장 속의 ‘개인의 논리를 배제한다’의 날카로움은, 아무리 머리 속의 준비를
하고 읽어도 도저히 다 담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몸을 맡겨 보는 것은 어떨까.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유럽의 감성/기술/미학을 수입하여 내수용 제품으로 가공’하는 ‘작곡가’.
다카하시 유지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꼼수’ 이외엔 없을 것이다.

그들의 대표자가 「우리들의 청각을 막는 경계가 이 세계에 있을 리 없으니, 서구와의 비교라는 낮은 레벨의 이유로서가 아니라, 민족 고유의 감수성에 의해 길러진 음악을,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다케미츠 토오루, 다카하시 유지와 동세대의 인물로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현대음악작곡가 겸 수필가, 역주)라고 말할 때、유럽의 자원을 가져오던 레벨에서부터, 유럽적 기술유출을 담보로 한 아시아문화의 수탈이 이뤄지는 레벨로, 일본의 음악이 진입한 것은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지상에 울려 퍼지는 여러 가지 소리들을 하나의 생명으로서 표현하려는 것은, 모든 것을 사유하려 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그야말로 잘 알려진 꼼수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론을 배제하다 中)

◯◯◯은 만국공통어, 라는 슬로건.
이 슬로건을 방패로 내세운 ‘제 3세계’로의 침공.
두가지의 행위가 동시에 실천되는 것을
(나는) 전쟁이라고 불러오지 않았던가.
이 ‘꼼수’에 대한 저항은 오직
‘고전적인 전술뿐이다’라고 다카하시는 말한다. 

개인의 이론 추구를 위한 집단 대신, 집단의 이론에 선 개인의 연대, 특히 대중과의 연대, 일방적인 지식의 수탈 대신에 상호 학습, 고독한 권위 대신에 젊은 세대를 지도하기 위한 각 세대의 엘리트들의 결합, 공유제의 사유화 대신에 무명성의 추구, 기술로의 맹목적인 종속 대신 최소한의 기술의 최대한의 이용, 진보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낡은 것들의 연명 대신 기본적인 관계에 대한 재검토. (개인의 이론을 배제하다 中)

상황의 확인과 ‘전술’의 제안.
뛰어난 코치 같은 손놀림으로 다카하시 유지는 ‘연대’의 실천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와서야 (또 다시) ‘당연한 것’을 문득 느꼈다.
이것은 ‘중심주의’에의, ‘밀실비평’에의 비판서이다.
접사를 고르고, 실천하는 것은 나 그리고 당신이다, 라는 것을.

지금 나는 컴퓨터 앞에서
구 자철의 메시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그의 어필에 관한 (일본어) 소스는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현 상황을 개탄하기보다는 펜을 드는 편이 더욱 실천적일 것이다.
축구는, 만국의 공통어이다, 이 메르헨 (비일상적인 이야기: 역주)에게 있어
옆 나라에서의 절규는 그저 소음에 불과할 테니까.
(이 메르헨이 ‘중심주의’자에 의한 픽션이라면 더더욱.
예를 들면 http://amzn.to/cnT3Lq 처럼: 

픽시라 불리는 구 유고슬라비아의 스타이자 J리그의 레전드인 스코이코비치의 팬이었던 작가가, 스스로 당시 NATO의 포성이 난무했던 발칸 반도의 축구와 정치상황의 관계를 생생히 그려낸 책으로서 현재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일본 축구서적 명저 중 하나, 역주)
외견상으론, J리그에 종사하는 ‘작곡가’들의 퀄리티는 상당히 높다.
프로리그 발족으로부터 20년 만에, 이 정도로 ‘유럽적 기술 유출’
을 이뤄낸 나라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술’의 진보와 수탈에의 욕망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나, 이미 그 징후는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자본주의적 욕망’의 ‘꼼수’에 편승하지 않을 것.
‘빅클럽 > 스몰클럽 = 프로빈쳐(가난한 클럽을 일컫는 이탈리아어, 역주)
라는 암시에 혹하지 않을 것.
그러기 위해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제3세계’로부터의 찬가도,
유럽에서 날아오는 ‘슬픈 노래’도 아닌,
이웃나라에 울려 퍼진 ‘추모곡’ 일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노래가 메르헨이 아니게 될 때, 분명 어둠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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